금요일에 수폐인과 둘이서 술을 먹고 커피숍에서 (남자 둘이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ㅡㅡ) 뭔가 길게 토론했는데 수폐인이 삐질까봐 차마 못했던 말들을 해보자.
화자도 평소 생각이 잘 정리되지 못하고 청자도 자꾸 말을 끊을 수 있는 대화보다 글로서 정리하는 것이 이런류의 토론에서는 더 어울리겠지.
더불어 내 생각도 잘 정리해보도록 하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인식의 한계이다. 고로 평소 내 사상을 이 기회에 잘 정리해두자.
오늘은 제 1탄 자본주의 사회의 승자, 패배자의 변명
객관적으로 봤을때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 잘 적응해 살고 있는, 전 지구적으로 봤을때 상위 20% 안에 들어가는 기득권 계층이며, 동남아, 남미, 아프리카의 극빈층을 착취하는 약탈계층에 가깝다.
뭐.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지. 나와 서구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서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농장에서 정작 초콜릿은 맛도 보지 못한 아동들이 착취당하고 있는걸 모르는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구제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나쁜 초콜릿' 이란 책을 권해주겠다. 초콜릿을 먹는걸 꺼리게 될 수 있다. 다이어트에 효과적이지.ㅡㅡ) 그저 유니세프에 얼마간 기부를 하면서 쥐꼬리만한 양심을 달래고 있을 뿐이지.
그 착취당하는 아동들의 눈으로 보았을때 나는 분명 사회의 승자이며 기득권 계층이며, 착취자, 약탈자이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팔이 잘린 상처보다 자기 손톱밑의 가시가 더 아프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 이타적인 사람도 물론 있지만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극 소수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때 인간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처한 상황과 스트레스를 과대평가하여 받아들이기 마련이며 과대평가하여 받아 들이는 순간 그 스트레스는 실체화해서 과대평가가 아니게 된다.
따라서, 완전히 이타적이며 자기 자신의 상황을 만족하는 인간은 그야말로 극 소수다. 거의 모두가 패배자인 사회인거다. 사실 그게 정상이긴 하다. 원래 게임의 승자란 단 한명이며 나머지는 그저 승자를 위한 패배자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모두가 패배자인 이 사회가 어째서 무기력과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굴러갈까? 그건 일반적인 매체와 교육과정에서 전하는 대로 설명하자면 희망, 향상심 따위의 것들이라지만.... 하! 개소리다. 웃어주지. 그건 바로 중세 봉건 시대 이래로부터 부를 축적해온 자본들의 세뇌 때문이다.
희망이란 이런거다.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너도 승자가 될 수 있다.' 라는 개소리. 현실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으면 노비에서 집사 정도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절대로 주인은 될 수 없다. 개인이 개인의 힘으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수백년간 축적해온 그들의 부와 부를 쌓는 기술(기술이다.)을 능가 할 수 없다. 그들 만의 리그에 절대로 진입 할 수 없는거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국가가 한번 전복되어 기존 사회 기득권 층이 거의 몰락했을때나 가능하고, 그나마도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노력과 빛나는 재능, 천운이 따라줘야 가능한 일이다.
릴케가 그랬는데 '니 일상이 초라하다고 세상을 탓하지 말고, 풍요를 이룰 수 없는 니 자신을 탓하라'고. 참 웃기는 소리다. 그러니까 루 살로메한테 어장관리나 당하지.
무수히 많은 자기 개발서에서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 '노력' 이며 '재능'은 그 뒤의 이야기라고.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꿈에 다다를수 있을거라고. 웃기는 소리다. '열정' '노력할 수 있는 재능' 이야 말로 가장 훌륭한 재능이다. 열정을 가지고 싶지 않아서, 노력하고 싶지 않아서 안하는게 아니다. 노력 할 수 있는 재능, 열정을 가질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없는거다.
내가 코트디부아르의 노예처럼 일하는 아이보다 힘들게 일하고 노력해서 그 아이보다 잘 먹고 잘 사는걸까? 그럴리 없다. 마찬가지로 재벌집 아들놈이 나보다 노력해서 몇억짜리 차를 끌고 다니며 호화 생활을 누리는게 아니다.
내가 '노력' 이 부족해서 '열정'이 부족해서 그들 처럼되지 못한다는건 코트디부아르의 착취당하는 아이가 더 노력하지 않아서 나만큼 살지 못한다는 것과 진배 없다. 애초에 '노력'과 '열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승자가 되기 위한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없다.
그저 타고난 환경, 태어날때부터 결정지어진 계급이야 말로 결정적 요소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열정' '노력' 이 강조되는가? 당연히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야만 착취자가 더 이용해 먹기 쉽기 때문이다. 마치 당나귀의 머리에 달아놓은 당근 처럼 눈앞에 보이고 한 걸음만 더 내 딛으면 닿을것 같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고, 당근을 향해 달려가는 당나귀에 짐을 실어 옮기는 주인만이 이득을 보는 것과 같다.
그저 힘들게 힘들게 짐을 나르면 딱 죽지 않을 만큼의 여물과 때때로 콩으로 보상을 해주면 좋아라 해야 하는 그야말로 당나귀처럼 일하는 가축으로 세뇌하기 위한 비겁한 술책.
그리고 희망을 주기 위해 때때로 아주 가끔 어쩌다가 한번씩 노비에서 집사 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교활함. 하지만 파티장에 들어가고, 저택에 산다고 해도 집사는 귀족이 될 수 없다. 대를 이어 충성을 바치고 그야말로 견마지로를 다해야만 후대에서나 비로서 주인의 은총으로 하급귀족이나 되어 볼 수 있을 따름이지.
내가 하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고 내 일이 재미잇다고? 노예가 난 주인님을 위해서 일하는게 너무 재미있고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언젠가 열심히 하면 나도 주인처럼 될 수 있을거야 라고 생각하는것과 차이가 없다.
게다가, 원래 인간은 스트레스를 주면 그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생각까지도. 사실 나는 이일을 좋아하지 않지만 어쩔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차라리 그걸 즐기는 걸 택하는 경우가 많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거지. 이른바 '정신 승리' 라는거다.
뭐. 사실 그렇게라도 자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일지 모른다. 남보다 보상을 적게 받더라도 내가 이일을 좋아하니까 한다라는 걸로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럴거면 그냥 관련 학문을 깊게 파는 쪽이 더 합리적이다.
공부하는 것이 좋고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관련 학문을 공부하면 되는 일이다. 실제로는 현실과 타협하고 있으면서 본인 스스로 그걸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자신은 사실 계급을 뛰어 넘을 만큼의 재능도, 열정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그래도 나는 좀 특별하다.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환상에 잡힌 자본의 노예. (너말이다. 폐인. 괜히 쪽바리 자본의 노예라고 부르는게 아니지.)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나는? 거기서 별반 다를 바 없는 군상이지. 어찌보면 더 불행하다. 그저 운 좋게도 내가 남보다 조금 잘 할 수 있는 재능을 발견하여 마치 성적에 맞추어 대학에 가는것과 마찬가지로 직업을 선택하여 살아간다.
노력할 수 있는 재능은 없고, 열정을 가질수 있는 재능도 없는 주제에 사상이 삐딱해서 현실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반골. 현실에 불만이지만 그걸 바꾸기 위한 혁명을 일으킬 리스크는 질 생각이 없고, 학습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최소한의 사회적 의무만을 지며 스스로의 양심을 달래는 기회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 그게 나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기 힘든 사람이지.
노예라면 어떤가? 현실에 만족한다면 행복할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일 수 있다. 매트릭스에서 실제 현실을 외면하고 다시 매트릭스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 인물이야 말로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
누군가 혁명을 일으켜 계급을 타파 하고 유토피아를 건설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유토피아가 과연 모두의 유토피아일까? 까뮈가 말했다. 인간은 저항하기 때문에 인간이라고. 누군가는 그 유토피아를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며 저항할거다.
하지만, 부조리한 현실을 혁파하다보면 조금씩 조금씩 모두의 유토피아에 도달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수 밖에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에게 희망따위는 무의미 하니까.
결국은 정신 승리인거다. 내가 내가 잘난 맛에 살듯이, 인간은 완전해 질 수 있다고 믿고, 나는 이룰 수 있다고 믿는것.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다음에 시간이 아면 제 2탄. 우리나라 IT의 미래 에 대해서 또 장문의 글을 써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