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 까마득한 국민학교 시절 (토 달지 말라.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형님의 책꽂이엔  형님이 샀는지 누님이 사는지 알 수 없는 '청춘 스케치' 라는 두권짜리 소설이 있었다. 제법 유명해서 영화화도 되고 그랬었던것 같다.

게다가 두번째 권 마지막에 외전 격으로 있는 본편 남자 주인공 친구인 학생 부부의 이야기는 제법 H 한 씬도 있어서 당시 성에 눈뜨던 나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포르노가 넘쳐나는 지금 보면 아주 귀여운 수준이지만...

거기 주인공이 대학생들인 '철수' 와 '미미'다.

내용은 간단하다. 요즘으로 치면 된장녀인 '미미'를 고추장남이 '철수'가 쫒아다니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다.

'미미'는 외모가 능력이 출중한 남자를 꼬셔서 팔자 고치는게 목표인 좀 미모가 되는 여성. 그리고 혼전 순결주의자.(다분히 자신의 상품가치를 상승시켜려는 의도인듯 하지만.)

'철수'는 '미미'에게 반해 수없이 퇴짜 맞으면서도 줄기 차게 쫒아다니는 못생기고 키 작고 공부도 못하며 잘하는 거라곤 당구 밖에 없는 동정남.

그 밖에도 갈비집 아들이며 여성을 꼬시는게 특기이며 사교춤(특히 탱고)을 잘 추는 '돈 카사노바' (돈 쥬앙 + 카사노바) 가 기억에 남는 캐릭터로군.


이 소설은 다른 몇몇과 함께  유년 시절 나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소설이다.


그 소설에 '철수'의 좌우명이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말라' 였다. 지금에야 이게 푸쉬킨의 가장 유명한 시의 첫머리라는 걸 알지만 그때만 해도 난 저게 저 작가의 오리지널인줄 알았었더랫다.

그리고 '참 멋있는 말이구나.' 라고 감탄햇다. 아니 감탄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저 문구를 읽는 순간 뭔가 두둥! 하고 문구가 뇌리에 꽂혔다.

플래쉬 메모리급의 기억력을 자랑하는 내가 20년이 다되가도록 등장 인물이름 까지 까먹지 않앗다는건 얼마나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나는 그때 이후로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렇다. 했.었.다.


이제껏 세상을 살아온 30년. 나의 삶은 몇번이나 나를 속였는가? 그때 마다 나는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지 않았는가?

나의 삶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살아 가는것. 60억의 스토리 중에 유일하게 내가 주인공인 내가 써가는 나의 이야기. 나의 삶이 나를 속인다면 그것은 분명 나의 인과에 의한 것일 게다.



요즘 나는 나의 일때문에 참 힘들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힘들었던 적이 별로 없었던것 같다.

작년 초에도 물론 힘들었지만 현재의 일이기 때문인지 지금이 훨씬 힘든것 같다.

오늘로 2주째 밤샘. 이렇게 연이어 밤샘을 해본적이 있었던가? 물론 없다.

주말도 없고 밤낮도 없고 오로지 일.일.일. 같이 일하는 사람들마저 짜증나기 시작햇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서 'A' 라고 말하면 'B' 라고 알아 듣고 나중에 '니가 B라고 말햇지 않느냐? 그러니까 니 탓이다.' 라고 지껄이는걸 듣는게 신경질 난다.

다시 내가 '그게 아니라 A 라니까요. 이러 이러해서 A 라고 말했잖습니까?' 라고 하면 또 '그러니까 그게 B 라는 소리잖아.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 듣냐?' 라고 말하는건 더 열받는다.

똑같은 상황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몇번이고, 몇번이고 설명을 해줘야 하는일에 진력이 난다.



그렇다. 나는 어딘가에 하소연 하고 싶은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나와 공감하며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을 같이 씹어주기를. 그리고 나를 위안해주기를. 나를 이 상황에서 꺼내 주기를. 그것이 안된다면 이 상황을 잠시 잊게 해 주기를.


삶이 나를 속이고 있다고 노여워 하고 있는 거다. 어허허허허허허... 내 인격 수양은 초등학교 이후로 발전된게 없구나.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냥 소년으로 남고 싶어 햇던 것 같다. 왕 보단 왕자 가 좋았다.

그래. 이렇게 힘든 시기를 겪고, 거치고, 넘기고 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체념하여 익숙해져 '적응' 해 나가는 것이 '어른'인 거겠지.

나는 이미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지고 있는 '어른'인거다. 언제까지고 힘들다고 때를 쓰는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으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가 되어 도태된다.

이미 내 삶은 '아큐우 정전'의 '아큐우' 같은 삶이란 걸 잘 알고 있음에도.... 아무리, 아무리 힘든 오늘을 보내도 진정한 의미의 평안이란 죽기 전까진 결코 오지 않을 것임을. 살아가는 동안 매 순간 순간마다 힘든 지금, 힘든 오늘을 보내게 될 것임을 뼈져리게 잘 알고 있음에도 나는 '어른'이기 때문에 결코 투정과 포기는 용납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있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라는 말은 그저 '포기하지 말라' 거나 '희망을 잃지 말라' 거나 '인내심을 가지라' 등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멋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저 말이 무척.... 무척 잔인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





- 푸쉬킨 -
Posted by 행인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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