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일상다반사 2010. 9. 13. 11:43
어김없이 벌초의 계절이 돌아왔다.

내가 창원 본가에 귀향하는 정기적인 년간 행사로 설, 추석, 벌초 이 세번 중에 육체적으로 가장 고단한 행사이다.

사실 이 세번뿐 아니라 일년중 거의 이때만큼의 피지컬한 운동능력이 요구되는 때가 없다.

거의 경상도 전지역을 이동하면서 해야 하는데, 6.25 와 조상님의 유지등 때문에 산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부부는 나란히 매장되기 마련이지만 나의 가문의 경우 여기서 하나 외따로.. 저기서 하나 외따로.. 이런 형국이라 수가 무척 많다. (총 6곳을 돌아야 한다.)

거기다가 묘를 쓸 때 마다 앞으로 여기를 선산으로 하자는 생각에서인지 부지를 무지하게 넓게 잡은 터라 인적없는 남부 지방 산중에 한곳당 백평은 가뿐히 넘길 곳들을 벌초하고 있자면 나무가 되어 있는 아카시아와 정글이 따로 없는 길게 자란 이름 모를 풀들과 덩굴에 욕이 절로 나올 판이다.

벌이나 뱀이라도 나오는 날에는 그야말로 작업속도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된다.


예초기가 세대가 돌아야 겨우겨우 하루에 끝을 볼 수 있고 이번처럼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풀은 무겁고 예초기의 캬뷰레이터는 습기에 젖어 엔진 시동은 자꾸 거지는 데다가 우비는 갑갑하기 그지 없고, 뇌성이라도 울리는 날에는 갈쿠리, 낫, 예초기 같은 금속 장비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 터라 벼락 맞지 않을까 노심초사 해야 한다.

실제로 몇주 전에 벌초객 한명이 벼락에 맞아 사망했다는 기사도 있었고..


생각 같아서는 가장 부지가 넓은 할아버지 묘소로 묘들을 옮기고 싶지만 벌초에는 참여도 안하는 서울 종조 할아버님 일가가 묘는 함부로 옮기는 게 아니라며 반대를 한다.

그런거 함부로 했다가 집안에 누가 병이라도 걸리는 날에는 '묘소를 옮겨서 조상님이 노하셨다' 의 시츄에이션이 될게 뻔하니 함부로 할 수 없는거다.

뭐. 내입장에서야 매우 불합리한 미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조상신을 모시는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

사실 그런 설이나 추석 같은 종교적인 (전통적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우라나라 유교의 고유 종교행사이다) 행사라도 없다면 가족간의 유대가 약해질것이 뻔하니 딱히 반대하거나 하지도 않는다.


성장하는 동안 매해 매해 돈을 얼마 주고 벌초에 직접 나서지 않는 일가들을 원망하는 어머니의 원망과 너는 커서 그러지 마라 라는 교육을 꾸준히 받아왔기 때문에 나는 회사에 아무리 바쁜일이 있어도 벌초에는 반드시 참석해 왔다.


사실 해보면 알지만 돈 10만원 던져주고 한 가족이 통으로 안오면 일단 장정이 최소 한명 이상 빠지게 되기 때문에 훨씬 힘들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꾼을 고용하는것도 아니고 말이지. 옛날에야 묘소마다 묘지기가 있어서 묘에 딸린 작은 경작지를 소작을 주고 그 대가로 벌초를 부탁하는 형태였는데 요즘 누가 그런일을 하리? 더 좋은 땅도 놀리고 있는 판국이고 자기 조상 묘도 벌초하기 힘든 마당에 선대에서 모셔온 집안의 묘소를 벌초하기엔 존심상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족보를 살펴보면 전부 양반의 후손들일진데 (거의 대부분 조작된 거지만.) 몇대 위 조상이 남의 집 묘소나 벌초해주는 소작농이었다는건 잊고 싶은 과거겠지. 사실 역사왜곡은 일본이나 중국만 하는게 아니라 우리도 하고 있는거고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에서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실 대단한 양반집도 아니었고 그저 시골의 쬐끄만 지역의 그렇고 그런 퇴락한 반가의 하나였던 우리 가문은 역시 그렇고 그런 지방의 소시민이 되어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묘소를 직접 벌초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사실 퇴락한 반가라고 하지만 어쩌면 훨씬 몇대위에서 나름 잘나갔던 조상님이 부농이 되어 족보를 샀을지도 모를일이지만 뭐 어쨋거나 그렇다.

지금에 와서야 그런거 체면치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말이지...

아뭏튼 결론은.... 벌초하기가 빡세다는 거고 올해는 특히 빡셌다는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빡셀거라는 투덜거림인거다.


내가 나이가 들고 아버지 세대들이 연세가 드셔서 직접 거동하기 힘드시게 되면 청상 일꾼을 써야 하겠지만.. 앞으로야 어쩔수 없다.

힘든 주말이었다.ㅡㅡ
Posted by 행인_1
,